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널드 레이건 (문단 편집) === 일화 === 그의 일화들을 보면 그는 평소 엄청난 입담과 유머 센스를 자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유머가 미국인들에게 크게 다가와 현재 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으로 꼽히게 된 큰 근거가 되었다. * [[배우]]였던 시절에 유일한 히트작이 《폭풍우의 청춘》이라는 영화였는데, 레이건 재임시절 이 영화를 반복시청하는 것이 레이건에 대한 충성심의 증표라는 우스개가 있다. 어느 [[정치인]]은 무려 60번을 봤다고 유머러스하게 주장했다. 첫 결혼상대였던 제인 와이먼[* 이 사람은 평생 공화당 지지자였다. 오히려 이 당시의 레이건은 민주당 지지자였었다.]은 이혼 [[사유]]를 묻자 "《폭풍우의 청춘》은 이제 질리도록 봤으니까"라고[* 장래가 불투명하게 보였다는 말을 재치를 담아 전한 것. '''매우 예리한 시선'''이 담긴 말일 수도 있는 게, 레이건은 용모와 훤칠한 체격을 다 갖춘 덕분에 인지도는 갖췄으되 배우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47년 미국노동총연맹 산하 영화배우협회 회장에 선출된 후부터 정치적 역량을 길러나가며 본격 성공가도를 밟기 시작한 것. 다만 배우협회장에 선출된 시기가 제인과 사이가 멀어지던 시점이었고, 낸시와 재혼 후 정치에 입문해 [[상전벽해]] 수준으로 위상이 달라졌기 때문에, '''낸시가 옆에 있어준 덕분에 로널드가 저렇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호사가들도 있었다고 한다.] 말했다고 한다. 물론 이건 그냥 하는 말이고 실제 이혼 사유는 둘 사이에서 [[참척|태어난 아이가 얼마 못 가 병으로 죽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후 방황하던 와이먼이 동료배우와 바람을 피우며 이혼을 요구해 레이건은 무척 힘들어했다고 한다. 이런 뒷사정이 있어 이혼전력이 레이건에겐 치명상이 아니었던 측면이 있다. 그래선지 레이건은 평생 첫 번째 아내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간혹 동료 정치인들과의 모임에서 그의 이혼이나 전처가 화젯거리가 되면 정색을 하는 탓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고. 사실 지금도 할리우드에서는 이혼이 많지만 당시 할리우드 배우들은 이혼이 더 많았는데, 전 부인 제인 와이먼처럼 4~5번 이상 이혼하고 혼자 늙는 것이 평균 수준이었을 정도였다. 2차대전 이전 할리우드에서 유명했던 배우들 중 2번 이상 이혼 안 한 배우들이 드물 수준이라 레이건처럼 단 한 번 이혼한 것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 등 공산권 여배우들도 이혼이 많았고 한국과 일본 연예계가 그나마 이혼이 적은 편이다. * 강경한 [[중화민국]] 지지자였다. [[1971년]]경,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을 밀어내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인정되었을 당시, 매우 불쾌해하며 미국이 국제기구를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뿐만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지국인 [[탄자니아]] 대표단이 승리의 춤을 추자 그들을 '원숭이', '식인종'에 비유하며 비난했다. * 단, 로널드 레이건이 한창 대통령에 재임했을 당시에는 [[덩샤오핑]]이 한창 개혁개방 정책에 나서며 서방과의 우호관계 구축에 노력했던지라 레이건도 중국과의 친교를 다졌고, 1984년에 중국에 방문하기도 했다.[* 이 당시 중국 방문을 두고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이 당시 중국의 화장실 대다수가 재래식에 화장실에 칸막이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고, 주요 관광지와 백화점들의 화장실도 위생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는 경우가 많아 위생적인 화장실 찾기가 쉽지 않았다.(사실 당시의 한국도 올림픽으로 개선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사정은 크게 다른건 아니었다.) 당연히 중국 당국에서도 문제점을 인식하고는 있던 만큼 나름대로 화장실에 신경을 썼고, 그래서 레이건과 영부인인 낸시는 위생적인 귀빈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만리장성 바디링 화장실에 다른 그 관리자가 어지간히 골통이라서 낸시 여사가 화장실 이용을 다 마치자 바로 문을 잠궜고, 결국 다른 고위급 인사들은 볼일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그 관리자가 레이건과 영부인만 고위급 인사고 주변인물도 고위급 인사라는 생각을 안하면서 고집을 부렸던 것.(...) 결국 다른 고위급 인사들은 재래식 화장실에서 쪼그려 앉으며 경호원과 같이 볼일을 봐야했고, 이러한 일로 곤혹을 치른 후에 경호원들이 방문경로에 위생적인 화장실을 발견할 때마다 점거(?)해서 현지 시민들을 불편하게 한 바람에 중국 국무원과 마찰을 빚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졌다. ] * [[1984년]] 대선 당시 경쟁 후보였던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과 레이건의 2차 대선토론은 미국 대선토론 역사상 명장면 중 하나이자 레이건의 입담을 나타내는 예시로 꼽힌다. 사회자가 레이건에게 너무 고령이라 직무수행에 차질이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하자 '''"전 나이를 가지고 문제를 삼지 않을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상대 후보가 너무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는걸 절대 정치적으로 공격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재치있게 받아친 것.[* 앞서 레이건은 1차 토론에서 평소와 다르게 심하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여 국민들을 불안하게 했고, 사회자도 이를 염두에 두고서 나이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불리한 상황을 이 재치 있는 답변으로 단번에 역전시켰다.] 좌중은 웃음바다가 됐고 먼데일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먼데일은 이 순간 자신이 선거에서 졌다는 걸 예감하고 토론 끝나고 자기 부인에게 가서 "여보, 아무래도 선거 끝난거 같아"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레이건은 49개주에서 선거인단 '''525 대 13'''로 승리를 거두는 압승을 기록했고 이는 '''미국 대통령 선거 사상 최대의 선거인단수로 승리'''한 선거였다. 그만큼 그의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승리를 거두지 못한 곳은 '''먼데일의 고향'''인 [[미네소타]]와 골수 민주당인 [[워싱턴 D.C]] 뿐이었다. 먼데일은 최초의 여성부통령 후보인 제럴딘 페라까지 앞세워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려고 했지만, 오히려 중도층의 반감을 사서 역사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후로도 상상을 초월한 압도적인 패배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본인이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것 뿐만 아니라 공화당의 위치를 강경보수로 재정립하여 흔들리던 위상을 회복시킨 것으로 인해 정치 전문가들은 그를 공화당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로 표현하기도 한다. * 다만 이렇게 본다면 재임기 내내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재임 초기에 금리가 20%에 달하고 실업률이 10%를 넘는 경기침체의 후폭풍으로 인기가 폭락해서 1982년 중간선거에서 패배하기도 했고, 재임 후반기에는 이란-콘트라 사건과 블랙먼데이 사건의 여파로 인기가 폭락했는데,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허버트 부시가 네거티브 전략을 써서 지지율을 올리기 이전까지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예상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 언젠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즈먼드 투투]] 주교의 방문을 받았는데, 투투 주교는 레이건의 면전에서 미국과 레이건의 강경정책을 비판했다. 투투 주교가 돌아간 후 누군가가 "투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투투(TuTu)라는 이름의 운율에 맞춰 '''"So-So(그저 그랬어요)"'''라고 말해서 좌중이 뒤집어졌다고. 이 일화는 레이건의 장례식날 한 번 더 언급되었는데, 이 때도 폭소가 터졌다. 마지막 가는 날까지 사람들을 웃긴 셈. * 대통령 후보 시절 카터와 TV 토론을 벌였는데, 토론이 끝난 후 참모들이 "처음 토론에 나선 것 치고는 꽤 훌륭하셨습니다."라고 말하자 덤덤하게 '''"무슨 소리! 나는 [[존 웨인]]과 같이 촬영한 적이 있는데!"'''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무명배우인 자신이 존 웨인 같은 대배우와 같이 촬영 할때도 안 떨었는데 카터와 맞서서 덜덜 떨 까닭이 있겠느냐는 농담으로 자신이 무명배우였다는 걸 강조한 자학개그이자, 동시에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사실 [[존 웨인]]보다 못한 인물이라는 식으로 상대를 돌려 깐 것이기도 하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존 웨인은 할리우드 내 유명 보수주의자이다. 레이건의 드립 실력이 어디까지 갔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예시.] * 카터와의 TV 토론 때 카터가 자신을 비판할 때 씨익 웃으면서 "또 시작이네요(There you go again)"라고 받아넘기는 행동이 명성을 얻었다. 당시의 실제 동영상은 [[http://www.youtube.com/watch?v=Wi9y5-Vo61w|여기]]서 볼 수 있다. 레이건의 이 행동은 토론에서 상당히 초조하고 불안정해 보이는 카터에 비해서 레이건은 상당히 여유있고 위트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레이건의 뛰어난 이미지 활용을 보여주는 사례. * [[뉴햄프셔]] 주에서의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상대방 후보 [[조지 H. W. 부시]]의 연설이 끝난후 상대방 후보를 지지하는 탤래그래프 지의 편집장인 진행자 존 브린이 음향 담당자에게 "레이건씨의 마이크를 꺼버려."라고 하자 "미스터 그린, 이 마이크를 쓰는 비용은 내가 내고 있소."라고 일갈했다. 비용 얘기가 나온 이유는 저 경선토론회를 여는데 들어간 비용을 전적으로 레이건 선거본부에서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Rd_KaF3-Bcw|원본]]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말그대로 [[폭풍간지]]. 브린을 그린이라고 부른 것은 한마디로 이름도 헷갈릴 정도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이 토론에 감놔라 배놔라 한다는 뜻. * 생사를 다투는 상황에서도 꽤 위트있는 농담을 했는데, 1981년 암살 시도로 부상을 입어 들것에 실려나갈 때는 자신의 상처 부위에 응급처치를 하던 간호사들에게 '''"내 아내 낸시에게 허락은 받고 만지는 건가?"'''라는 말을 했고, 수술실에 도착했을 때는 의사들에게 '''"여러분들이 공화당원이기를..."'''이라는 말을 했다.[* 그 [[드립]]에 수석 [[의사]]가 "지금 이 순간은 저희들 모두가 공화당원입니다, 대통령님."이라고 받아쳐줬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살았다.'''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아내 낸시 레이건에게 "여보, 수그려야 하는데 총을 피한다는 것을 깜빡했어(Honey, I forgot to [[더킹|duck]]). 내가 아직 영화배우였으면 피했을텐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고. 이 말은 [[뎀프시롤]]로 알려진 미국의 유명한 복서 [[잭 뎀프시]]가 1926년 진 터니에게 패한 후 자신의 아내에게 한 유머로 유명한데 적절하게 리바이벌한 것. [Youtube(Krjmr7laKzY)] * 해당 총격사건이 있었던 약 2달 뒤 베를린에서 연설을 할 때 커다란 풍선이 터지는 일이 있었다. 마치 총소리처럼 들리는 해당 풍선 소리가 제법 커서 좌중의 이목이 집중되었으나 레이건은 움찔하지조차 않았고 잠시 뒤 '''"빗나갔군요.(Missed me.)"'''라고 말한 뒤 연설을 계속하려 했다. 당연히 좌중은 환호갈채. * 대통령 재임 시절 야당인 민주당을 불황의 이유로 들며 비판하자, [[ABC(미국)|ABC]] 뉴스의 샘 도널드슨이 "최근 지속 경기침체에 대해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실수와 국회탓을 하는데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하자, "책임이 좀 있죠.[* 'Yes'의 의역. 영어에서 부정의문문의 사용이 한국어와 정 반대라 '예'라고 직역할 수 없다. 자세한 사항은 [[no]]문서 참조.] 저도 오랫동안 민주당원이었으니까요"('Yes, because for many years I was a Democrat)"라고 응수했다. * 재선에 도전 중이던 1984년 8월 11일에는 대국민 주례연설 직전에 '''"국민 여러분. 저는 방금 소련을 멸망시킬 명령을 승인했습니다. 5분 후에 우리 군의 폭격이 시작될 것입니다."'''라는 흠좀무한 멘트를 남겼다. 사실은 방송 직전에 입을 풀기 위한 조크였고, 실제 방송에도 나오지 않았지만 소련군에서 이 내용을 인지하고 약 30분간 긴급대기 태세에 돌입했다는 후문이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We_begin_bombing_in_five_minutes|원본]] * 위트 있는 레이건도 멕시코에서 어리버리를 탄 적이 있는데, 멕시코 국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는데 그들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레이건이 연설을 마친 후 한 멕시코 고위관리가 일어나 [[스페인어]]로 연단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의 연설에 멕시코 국민들은 박장대소했으며 연설이 끝나자 열화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았다. 머쓱했지만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레이건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는데 옆에 있던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가 이렇게 귀띔했다. '''"저 사람은 각하의 연설을 통역한 것 뿐입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